지난 여름 손가락질.



전설의 리틀 농구단


처음부터 농구를 하길래, 아 단지 소재만은 아닌가보다 라고 생각하며 보기 시작했는데, 정말 생각보다도 너무 농구를 많이 했다(...) 나로서는 악기를 연주하며 연기하는 것과 비슷한 기능적 노동의 강도라고 생각되는데, 심지어 진짜 농구공을 튕기다니 1열 관객이 거의 코앞인 것 같은데..뒤쪽에 앉았음에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저 거친 장면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 아니 이 개별적이고도 전체적인 합을 위해 다들 대체 얼마나 연습들을 했을까, 싶어서 시키지 않아도 매회가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제발 넣어야되는 골을 못 넣는 경우는 없게 해주세요..(근데 봤어.. 흑흑 종우야)

 

처음 보면서 흠칫했던 것은 아무래도 바다에서 아이를 잃은 이에 대한 상당히 무거운 위로의 장면이었다. 극 전체적인 톤에 비해 급작스럽게 무거워지는 속초바다 장면이, 다소 생경하게 등장한 다인아버지라는 인물이 바닷가에서 아이에게 제사를 지낼 시간을 마련해준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이 작품이 안산에서 태어나 자라왔다는 점이 상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의도가 완연한 노란 불빛들과 함께하는 긴 후주. 극중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더라도, 보는 이를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꽤 조심스럽게 전달된다고 느껴졌다. 사람은 다 변한다는데, 왜 아빠는 날 못 잊고 이렇게 계속 여기 와. 단순하고 아이 같으면서도 어른 같다. 그날의 시간에 머물러있는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가사.

 

넘버가 (듣기)쉬우면서 좋고, 무엇보다 가사가 아주 잘 붙었다. 이렇게 듣기 편안한 창작뮤지컬을 만나다니 너무나 기쁘다는 고인물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든 냉큼 다가갈 수 있는 넘버를 갖추고 있는 작품임은 분명했다. 바로 뒤에서 생동감 있게 받쳐주는 밴드가 있어 더 좋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묘하게 리딩이나 트라이아웃 공연 같은 느낌도 살짝 들었다. 매회 땀범벅이 되어 종합예술을 해내는 배우들도 참.. 그렇게 몸을 쓰며 노래하고 연기하는데 흔들림이 없으려면.. 역시 연습 뿐일까. 어마어마한 절창의 배우가 아니더라도 각자, 또 다같이 노래할 때 누구 하나 부족한 게 없이 들렸다.

 

거듭되는 고민 끝에 다듬어져 나온 극이라는 것이 여기저기 티가 났다. 장면의 전환이 다소 잦은 편이지만 밴드가 바로 뒤에서 브릿지를 받쳐 주고 있어 썩 나쁘지 않게 느껴졌고. 교실과 운동장과 속초와 전국대회라는 엄청난 장소 변화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연출력도 좋았다. 이렇게 삐걱거림 없이 편안하고 흥미롭게 진행되는 것만 해도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정말 반가웠다....

제 입으로 카사노바라더니 갑자기 여자 한번 만나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지훈의 가사는 수위를 바꾸는 과정이 짐작될 정도로 투명해서 귀여웠다. 그래 남자애 넷이 모였는데 아무렴. 한명쯤은 여자 밝히는 캐릭터가 되어야만 했겠지. 그래서 이를테면 지훈의 예쁜 누나들 많아라거나 저 멀리 여자들 함성같은 승우의 가사는 살아남아있다. 뭐 그래. 그 정도야. 아마 미숙을 단지 예쁘다, 섹시하다 라고 그리지 않고 멋지다’, ‘자상하다라고 칭하는 데도 어떤 노력은 반영됐을 것이다. 무려 남고 스포츠물!에서도 이렇게 시대의 변화가 보인다.

결국엔 남자아이들의 우정과 성장 이야기라는 뻔함이 분명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리농이 산뜻하다고 느껴지는 건 (보통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스토리를 향해 달려가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성불을 핑계로 나름 캐릭터마다 파트가 있음에도, 그 애들의 사연을 보는 것과 함께 수현이 귀신을 보고 농구를 통해 어떻게 자신을 극복해가는지, 또 종우가 어떻게 농구를 다시 나의 농구로 돌이키는지의 스토리가 같이 가기 때문이다. 귀신선배들이 다시금 일진애들로 나올 때 관객들이 종종 웃기는 하지만 그 장면에서부터 수현과 코치가 함께 농구를 할때까지의 스토리는 남다른 집중력이 있으며 귀신들의 한풀이, 와 수현의 농구를 비교적 묵직하게 연결시켜 준다. 친구, 자신감, 성과가 아니라 열정,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의 기쁨. 단지 성장이라 뭉뚱그리기에는 하나하나 잘 빚어 놓은 주제들이 결국은 농구로 귀결되는 깔끔함도 있다. 성과, 아니 그냥 한 판. 농구는 종우에게, 그리고 수현에게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그냥 농구 한 판이면 됐는데. 나에게 농구는 그런 거였는데, 나의 고민들은 고작 그런 거였는데.

그리고 있지만 없는 취급 받았던 것들이 여럿 뭉치면 그래도 무엇인가는 변한다는 것. 안될 것 같은 오합지졸(코치 포함)들이 모여 여전히 성과는 없지만 최소한 그들의 삶을 바꾸었다는 것. 수없이 반복된 주제인 것 같지만 뒷마무리의 찝찝함 없이 이렇게 잘 끝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하나쯤 있어도 좋은 것 같다.

 

+아니 근데 역대급 성불사기사건이 아닌지.. 찐소원은 따로 있었으면서 각자 수현이 끌고 하고 싶던거 다 해본 선배들 모냐 대다나다 진짜


++상태는 수현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코치한테 슛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마지막까지 슛을 배운다...(왈칵) 사실 볼때마다 배우가 농구를 너무 잘 하는게 보여서 안보이는 척 딴청을 피웠는데도 온몸이 준비된 농구인인게 보였다. 그래서 믿음직스럽긴 했지만..

그나저나 상태는 용돈도 하나도 못 받는데 5천원빵을 하다니 승우선배 너무하다. 그래도 졌지만 어물쩍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


+++‘남자라면 덩크슛 한번 쏠 줄 알아야지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끼거나 안 느끼거나. 종우마다 차이는 있지만 둘다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는 것이 귀엽다. 두 종우 배우가 이미지가 굉장히 달랐는데, 뭐랄까 찐따력..에서 궁극의 차이가 느껴지기도 했지만(그런 발성으로 그렇게 찐따일수가..용규배우..신기..) 석현배우는 실제로 농구남인 게 너무 느껴져서 약간 진지해지는 점이 있었다. 아니 수현이랑 진짜 농구하면.. 애가 을매나 힘드냐고.. 얄미웠다 지짜


++++뭔가 성장기를 꾸준히 봐온 듯한 동훈배우는 캐주얼한 톤에 독한 연기를 갖춰서 나름의 자리가 있다고 느꼈다. 현진배우는 정말 딱 수현이같은 느낌이었고.. 정말 이몸으로 농구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그자체.. 지환배우는 음색이 곱고 노래가 불안한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해냅니다(?) 후에 무한동력에서도 그랬지만 묘하게 혼자 꽁한 이미지가 있는 것이 맏내같은 다인에 어울렸고. 찬민배우를 여기서 처음 봤는데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관이 딱 제 스타일이에요.

 



레드북, 단상


남성의 야한 상상을 정당화하기 마련이었던 늑대 울음소리와 흡사한 올빼미 우는 소리를 채택해, 야한 상상의 기회를 여성에게 돌려준다는 설정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적 재능을 지닌 안나의, 좀 더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야한 상상, 캄캄한 밤이 와야지만 비로소 창문을 열고 불러들이는 나만의 에로티시즘. 기분 좋게 차가운 여름밤의 공기 같은 에로틱한 장면이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우리가 정말로 우리 자신을, 단독자로서의 존재로 받아들인 적 있었나. 정말로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채 나를 지킬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담긴 한줄이다그것은 수많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도 여자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질문되는 바로 그 문장이다. ‘여자가 어떻게 혼자 살아

여자는 재산이 없으니까, 여자는 순결을 지켜야 하니까, 여자는 힘이 약하니까, 여자는 감정적이니까,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여자는 누군가를 돌봐 주고 싶어하니까, 여자는 늘 사랑 받고 싶어하니까.


문제는 여자의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남자와 동등한 조건으로 실행해준 역사가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이며 토대는 교정된 적이 없다. 모든 격차는 누적의 결과이므로 우리는 권력이 없었던 시절을 상상할 수 없듯이 이 격차가 없던 시절을 상상할 수도, 격차를 없앴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써 충분하다. 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진실은 누구나 이해받고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으려면 정말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너 정말 괜찮니? 나를 걱정해주는 혹은 걱정하는 척 조롱하려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웃으면서 그럼 괜찮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진짜 자유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라는 한 줄의 가사는 정말 새삼스럽게 무서웠다. 세상에 정말 혼자 남았다고 생각될 때도 나는 나의 믿음만으로 굳건히 서는 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 순간 갑자기 여자라는 문제가 허공으로 부서졌다. 나라는 인간. 안나가 당연히 느끼던 세상에 속한 한 여자라는 자아를 깨어뜨리고 온전히 자기 스스로가 된다. 이것은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꼭 한번 해내야 하는 탈피다. ‘나는 나로써 충분해. 괜찮아 이젠.’ 그래서 법정에서도 담담하게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 안나는 당시 그다지 훌륭한 작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녀는 정말로 작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배니싱

 

보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세련된 흐름, 이라고 느껴지는 매끄러움이다. 그리고 그 매끄러움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것의 나열만이 되지 않도록 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갖추었다. 매니악한 소재라고 퉁쳐지지만, 실은 누구나 본 적 있고 그래서 예상 가능한 전형적인 장르물의 흐름. 둘은 친구가 되겠구나, 저놈은 악당이 되겠구나, 이쯤에서 배신하겠구나, 그럼에도 저 인물은 어찌하겠구나 등등이 너무나 예상 가능하고 심지어 바로 떠오르는 이야기들도 꽤 있다(일단 스파이더맨..?).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라는 동서고금의 주제도 동일하고..그럼에도 이 주제에 대한 진심이 전해진다는 점에서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웠다. 분명히 전해지는 어떤 정성.

소재와 스타일이 그러하니만큼 전형성과의 타협은 작가로서 고통스러웠겠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연뮤에서 이건 너무 중요해서... 작품의 생사를 가른다)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내 마음의 깊이만큼과, 타인에게 다가가는 노력에 대한 고민. 중요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막상 장르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우선 작가의 뱀파이어라는 존재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져 좋았다. 이 장르물에서는 사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보통은 동경해서 굉장한 존재로 그리거나(미적으로, 신체능력으로), 혹은 동정해서 외로운 괴물로 그리거나 하기 마련인데, 후자에 가깝긴 해도 케이에 대해서 작가는 그냥 너무 오래 살아온 한 존재라는 것에서부터 애정어린 출발을 한 것 같다. 홀로 기나긴 시간을 지나온 그 사람이 얼마나 영생을 버리고 싶을까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아주 오랜만에 내가 사람임을 지각하게-해 준 존재를 만난-K의 표정이라던가, ‘당신은 아픈 것이다’, ‘질병이다라고 단순명쾌하게 선언하고 고쳐 주겠다고 호언하는 의신을 바라보는 멍하고도 복잡한 표정, 그리고 곧바로 얼렁뚱땅 끌어 앉혀져 진료를 받는 황당한 상황-의신과의 접촉-에서 새롭게 갖게 된 K라는 이름. 유한한 우리가 예상하기 어려운 존재인 케이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그를 단숨에 사랑스럽게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그 존재의 바람은 그저 햇빛 속을 거니는, 꿈에서나 누리는 따뜻한 온기가 아닐까. 햇빛, 실은 그에게서 사라진 체온과도 같은. 의신은 처음부터 케이에게 손을 댔고 덥석, 잡아끌어 진료를 시작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사람의 체온. 거기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케이의 모든 행동들, 이야기들은 다른 존재를 통해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전형적인 사유다. ‘곧 응시에 대한 의미와, 과학적 사실 그리고 그 너머가 있으리라는 기대.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필요에의 의미부여. 혼자가 아니라면 어쩌면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를 영생에 대해서. 돌아보면 어느새 혼자였던 시간들에 대해서. 누군가의 등을 본다는 경험의 누적에 대해서. 나에게서 등을 돌려 도망치는 것들을 좇다가, 잡았다가, 놓아주었다가, 더 이상 좇지 않게 되었다가,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가, 다시금 마주했을 때의. 한순간의 충격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역사에서 살인이 얼마나 흔한지에 대한 당연한 냉소. 그 몇 방울을 얻어 먹으며 생명을 부지한 존재에 대한 동정어린 고민이 된다. 살인이 없었던 일도 아닌데 그 피가 생명인 자를 탓할 수 있는가. 이 만큼의 애정은 단지 ‘2차 창작같다는 점에 의해서 쌈싸먹히기엔 아까운 크기의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점을 발견하면 마음을 여는 것도 같고... 어느 한 존재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그를 위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과정을 존중한다. 그 결과라 했을 때, 배니싱은 이야기가 전형성으로 뭉뚱그려졌음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 존재의 외로움과, 꿈꾸었을 법한 작은 소망에 대한 애정. 혼자됨과 함께함이라는 작고도 큰 간극에 대해 생각한 깊이. 빛과 어둠이 주는 심상의 대립을 생각한 흔적. 여름의 한낮과 한밤중에 대한 감각의 흡사함. 질병과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사실상 맞닥뜨리고, 얼렁뚱땅 인연이 시작되고, 친해지고, 균열이 생기는, ‘나를 마셔까지의 흐름은 너무나 전형적이지만, 하나하나 인물들의 감정이 한눈에 보이도록 잘 그려진 장면들을 보여주고 지나가서 좋았다.

 

피부를 뚫고 비로소 그의 존재에 가까이 간다는 대사에서는 여렴풋이 배웠던 메를로퐁티의 성찰이 생각나기도 했다. 완연한 타인을, 결국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 의사니까 환자를 이해한다, 그 불투명한 말을 뛰어넘는 이해를 네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의사와 환자로 대변됐지만 결국은 타인에 관한 것이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곧 그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케이가 가장 배신감을 느낀 것은 그 부분이었을 것이다. 나를 이해하겠다고 했던 최초-어쩌면 오랜만의-의 사람이어서, 갑작스럽게 너무 쉽게, 자신의 시간에 다른 세계를 들였는데.  과학을 긍정하고 확신하던 의신이 결국 비과학적 사실들, 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도 똑같다. 그런 점에서 햇빛속으로와 그 리프라이즈는 근래 본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세상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개별적인 쓸쓸함과 슬픔에 대해서. 끝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만큼의 단절과 고독을 감당한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를 사실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해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하는, 어리석음이 남아 있다면.

 

케이가 결국은 돌연변이체였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우생학과의 대립각을 세운 점이 괜찮다고 느껴졌다. 작품의 배경이 하필 그 시대였던 것도 묘하게 설명이 되기도 하고. 의신의 뛰어남을 동경하고 질투하던 명렬이, 명백하게 우월한 존재를 만났을 때는 오히려 두려움과 혐오를 보인다. 우생학의 야비한 단면들. 아니 근데 30년대 의술로 뱀파이어 혈액의 비밀을 밝히다니 의신 진짜 너무 지나친 천재인 거 아니냐고;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존재에 너무나 어울리는 민진배우, 매드사이언티스트와 멜로남주의 경계를 잘 오가는 도현배우, 그리고 귀여움과 애절함을 뽐내며 노래 불러주러 나올 때마다 기뻤던 용규배우의 시너지는 정말 좋았다. 용규배우의 명렬은 정말 너무 애잔하다. 빌런 포지션인데 이렇게 서사가 제일 잘 이해되다니(당연한가?).. 피붙이보다 더 정을 주던 사람을 위해 행동한 것뿐인데 모든 순간에서 그의 진심이 보이는데 모든 일이 잘못되어 갈 수밖에 없다니. 사실 배니싱을 한번 더 보고 싶던 이유는 넘버가 좋고 명렬이 애잔해서였는데 그게 다 용규배우 이야기였다(?) 

 

++이른바 짭프론테이션은 뭐 사실 하도 다중인격물(유사:빙의,환각)이 많아서 종종 봤던 거라 그러려니 하겠는데.. 의사가 붉은 시약 들고 자가실험-한결같이 인류를 위한다면서 실은 자기 좋자고-하는 장면은 정말 너무 앞장면 지금이순간 뒷장면 얼라이브일 것 같았다구... 이런 톤을 애써 다르게 가기도 어렵겠다만

 

+++처음 보자마자 의사들에게 뭔가 고소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따끔해요, 같은 소리 하는 의사놈들아! 어디 한번 환자 본인이 되어보실까!

 

++++그러니까 이게... 흡혈을 나를 마시라는 말로만 알려줘서 그렇게밖에 말을 못하게 된거 아닌지..(죽겠다는데 나를 마시라니 무슨 말이야) 이과한테 맞게 침착하게 잘 설명해줬으면 의신과 케이가 덜 묘한 관계로 보일 수 있었던 것 아닌지...

 

+++++여름날의 찬란한 햇빛 나를 태워버린다 해도 잠시라도 느껴보고 싶었어, 이 가사를 듣는 순간부터 볼때마다 올라프가 떠올라버리는 나를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너무 올라프적인 모먼트란 말야.. 케이들이 약간 개구진 인상이어서 더 그랬단 말야.. 선글라스 왜 씌우냔 말야 진짜 In Summer야 뭐야.. 그만해... 슬픈 장면이란말야.. 라며 나를 말려보지만 도무지 안 떠올리게 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고향, 을 듣고 한순간 어두워지는 케이의 표정을 보며 진정해보도록 하자. 나를 다독이고

 

++++++작품 전체에서 여름의 심상이 짙게 느껴져서 좋았다. 특히 여름의 밤 공기. 열기가 가라앉아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그 조용하고 견딜 만한 시간이 느껴졌다. 여름밤은 참, 짧기도 하지. 뱀파이어가 아니더라도 그 말에는 절실히 동의한다. 여름의 아침 해는 절망스럽지.





봄의온도 손짓.


봄이 왔다.

겨울을 균열낸다는 느낌이 든다. 얼었던 강이 조각으로 나뉘듯, 안정적이던 기운이 갈라지고 조각난 채로 떠다니는 상태가 된다.
봄의 무기력은 여름 혹은 겨울의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런데 대부분 바로 그 시점에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내가 시작이 두려운지, 우울이 두려운지를 헷갈리기도 했다. 뭔가를 시작하는 시점이 싫어서 울적한 무기력이 오는 것인지,그 반대인지를 생각했지만 결국 별다른 것을 시작하지 않을 때에도 봄의 균열이 반갑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외로움이 차가움이라는 비유를 종종 듣는데, 근래 새로 노래를 듣다가 '차갑고 날카로운'이라는 수식이 붙는 것을 듣고 정말 그런지 생각해 보았다. '차갑고 날카로운'이라는 우리말의 느낌이 외로움과 닮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외로움은 대부분 더운 감정이다. 뭔가 덧씌운 듯 덥고 탁한 기운. 답답한 봄의 공기처럼 코와 팔뚝에 닿아오는 거림칙한 감정. 나를 제외한 화기애애함. 공감하지 못하는 일상에서의 분리.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상태는 긍정적인 고독이 된다. 혹은 청명한 관계성.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만, 봄이 뭔가를 균열낸다. 

겨울이 갔다.
일년이 아직 꽤 남았있다. 
허무함이 나를 잠식하는 것을 이겨내는 데 몇 달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뭐, 누구나 각자 일년에 몇 달은 견뎌내며 살아가니까.





사랑을 하는 여자. 단상 손가락질.


나와나타샤와흰당나귀


'난 여자라고는 당신밖에 없소' '나는 이렇게 세상 외면하고 당신만 본다니까' 하는 쉰소리를 듣고 행복했던, 둘만 있어도 풍부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자야가 이야기하는 것이니 글쎄, 백석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못나고 미운 남자였는지는 실은 우리가 후대에 봐서가 아닐까. 그 시절 기생으로 살았던 자야가 어떤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그가 없이, 그의 시가 없이, 시를 쓰는 그가 없이. 그저 희생하고 참고만 산 것이 아니냐며 가엾게 여길 일이 결코 아니었다.

단 한번이라도, 단 한명이라도 세상 다 버리고 사랑할 수 있었던 순간이다. 이후 백석과의 단절을 선택한 것도 자야이며 -불확실과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하고 선을 넘어 다시 만나지 않은 것- 만나려 했다면 어쩌면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자야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시와 그리움을 품고 이 땅에서 스스로 살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나, 하고 생의 끝자락에서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이루었고,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그의 시 한줄과 바꾸지 않을 만큼 그를 사랑했다.
존경스럽고 부러운 삶이다. 백석의 시를 내리 다루면서도 자야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나나흰은 특별하다. 백석의 그 어떤 다른 면모라거나 다른 여자라거나 관계라거나. 그거 다 알 바 아니다 싶을 만큼 자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자야의 기억처럼 마구 건너뛰는 시절의 모든 순간들에서 자야가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사랑을 했던 그 여자가 얼마나 단단하고 또 나약했는지. 결코 친절하지 않은 극은 자야의 넋두리와 공상과 중얼거림을 그저 다 받아들여 보여준다. 백석은 그 안에 사실상 시구로만 자리할 뿐이다-물론 그 시는 자야에게 결코 작은 것이 아니기에, 그만큼 묵직하고 지배적이지만-. 완연히 자야의 시선에서만 그려지는 그 자신의 사랑. 나도 너만큼이나 이기적이다. 하는 당당함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아프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인지배우를 분명하게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신기할 정도였다. 처음에 자야가 노인의 걸음으로 걸어나와 평상을 바라보는 것을 보는데 그냥 눈물이 쏟아져서 놀랐다. 그 걸음으로, 이 공간을 맴돌며, 그의 시와 눈과 온도를 생각하며 수많은 겨울을 푸르름으로 보낸 사람이구나. 그냥 나왔을 뿐인데 울었다. 내내 자기 이야기를 하는 만큼 쳐다보는 눈빛 하나, 매만지는 손끝 하나 내딛는 걸음 하나 다 신중한 진심이었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눈빛이라는게 이거구나, 하는 생각을 보면서 계속 했다. 3인이 나와 연기하는 극인데, 어느 배우로 보던지간에 '자야가 쳐다보는 것이 누구인지'를 보는 정도로만 보게 되는것 같았다. 나머지 둘은 무슨 사물이나 배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완전히 모노드라마처럼 볼 수밖에 없어졌다. 그리고 극이 그렇게 집중을 몰아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암, 이것은 자야의 사랑이야기지. 백석의 시가 노래된다는 의미를 극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것도, 결국은 자야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초재연을 보았는데, 계속 무대를 조금만 넓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넓히지 않는다면 아예 비워야겠지. 그것도 좋겠는데 내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니체에 관한 글에서, 삶을 사랑하는 극단의 한 형태라는 말을 보고 맞아 물론 그럴만하다, 라고 생각한 날이었다.
그렇다. "몇 번이라도 좋으니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회의주의는 생에 대한 집착의 다른 말일 수 있다. 유한한 조건 가운데 모든 것은 예측할 수 없고 허무하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한 생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실은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결코 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
 
영화로 보았던 오래 전에는 무슨 생각을했는지 이젠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글도 어딘가에 박혀 보이지 않는다-, 제법 쓸쓸하고 회의적인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나름 나이를 먹고 다시 보면서는 굉장히 열정적인 이야기라고 느껴졌다. 다만 뜨겁지는 않은, 차갑고 일차원적인 열정이다. 삶에의 어떤 내달림. 맹목적인.

우리가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과 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종종 듣던 질문, 왜 생의 불행이 너를 비껴가야 하지? 그런 차갑고 현실적인 위로의 극단적인 형태. 그렇다면 모든 불행이 다 너에게로 향하는 것은 어떨까. 지독하게 노력했음에도 닥쳐오는 불행에 자신이 찢길 때 너는 어떤 생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마츠코는 정말로 사랑이 있어 행복해하고 삶을 극단적으로 긍정할 때가 많다. 그 근원은 자기 안에서부터 넘쳐나오는 사랑이다. 비 한방울 오지 않는 화창한 날씨야! 비바람에 천둥번개가 치는 날에도 흔들림없이 그렇게 외친다. 
어차피 삶에서 우리가 느끼는 행복이란, 또 불행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혼자 힘으로는 어쩔 도리도 없으면서,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도 실상은 없으면서 행복이나 불행이 자신을 잠식한다고, 이제 나의 생이 무엇인지 알겠다고 잘난 척하지 말자. 네가 노력하는 것, 사랑하는 것,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 생이 보답해야 한다고 오만하게 판단하지 말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뭐든 할 수 있다는 듯이 살고 있는 것이다. 죽어서야, 그 지독한 불안과 회의의 껍데기를 벗고 마침내 나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류를 지독하게 어두운 인물로 색칠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항상 불만에 차있고, 어린 날엔 삐뚤어졌으며 자라서는 회의와 우울에 사로잡혀 있다. 온통 검은색. 누가 봐도 마지막 희망이 되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두운 존재였다. 그런 류에게 최후의 희망을 걸어보는 마츠코의 턱장없는 웃음에 이제는 보는 이들도 질려버린다. 약파는 야쿠자 어린애한테 배팅을 하다니 제정신이야? 그 풍파를 겪고도 학습이 안돼..? 허탈한 웃음을 뒤로하고 마츠코의 불행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블랙코미디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는 주인공처럼, 제법 심각한 생의 비틀림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 미친 게 아니야. 저 사람은 그래도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 뿐이야.  
류의 마지막은 어떤가. 잘못은 제가 저질러놓고 다른 악인을 찾아가서 죽여버린다. 인생을 15살 때부터 다시 살고 싶어. 그 말마저도 지독하게 회의주의자의 방식이라 우리는 그가 15살로 돌아가도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지는 못하리라는 예측을 한다. 류는 '다시 살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끔찍한 생일지라도 다시 살 수 없는 단 한번의 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마츠코의, 일생은, 끔찍하고, 외로운, 단 한번의 생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동정은 여전히 일분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자신에게 하자.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이라는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사랑이 아니라 몸만을 파는 동안에는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 모든 것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자신을 갉아먹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삶의 형태였을 지 모른다. 몸에 나는 상처는 실은 별 게 아니야.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육체로서 열과 성의를 다했을 때, 마침내 상처는 내 삶을 파고들지 않았었다. 진실이 된 가면은 쓸쓸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사랑이 찾아왔을 때-그리고 언제나처럼 당연히 떠났을 때-이제는 가면을 다시 쓸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것은 혐오스러운 삶이다. 사랑을 믿고, 열과 성의를 다해 사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겪는 삶이다. 나쁘다고 말할 수 있어? 다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데도 열과 성의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겪지 않는 것 뿐이다. 마츠코가 특별히 어리석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생에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생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지독한 회의주의와, 그만큼의 막대한 애정.


+'능력 있는 연출'을 만났더라면 배우들과 넘버의 고군분투가 이보다는 훨씬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주 단호하게 이것은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욕심을 부린 연출의 잘못이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나 좋아한다면 무대를 더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음감석에 앉았어야 했다. 소원이 있다면 향후 몇 년간 그 자동차 씬보다 더 후진 연출을 보지 않으며 살고 싶어졌다. 

++무대 디자인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데, 사용하는 의미가 없는 뒤쪽 2층과 박스 옥상(이렇게 보기 불편하고 무의미한 연출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에 자꾸 배우를 올려놓고 영상을 왜 저렇게 소란스럽게 사용하는지 전혀 알 수 없으며 마츠코의 방을 방 안에 있는 배우만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아 황당하기 그지없다. 마츠코가 그렇게나 돌아가고 싶어했던 집이 대체 어디있는지요? 

+++번안 및 연출의 잘못을 하나만 더 적자면 쇼에게 극적 무게를 더해준 것이다. 쇼의 이야기는 마츠코를 추적하는 관찰자에 머무르기엔 복잡하며 매력적이고, 엔딩에서는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정말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차지한다. 무대 가운데에서, 상당히 긴 대사를 토해내는 것-도무지 마츠코의 결말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쇼의 복잡한 감정과 정체성이 거의 넘버로만 표현되고 있어서 매우 주의를 기울이며 보게 되는 것도 피곤하고, 그가 마츠코를 동일시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 애매한 포지션에서 동정하는 것이 고모인지 자기 자신인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세 쇼를 모두 보았는데, 찬호 배우는 관객 집중 배려 차원에서 류가 아니라 쇼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를 다시는 못 볼것같다고 생각할 만큼 최악이었다. 두 마츠코 배우들은 모두 한 단계 도약한 면모를 보여주며 아름답게 고군분투하고, 정우 배우가 그리는 류의 깊이는 이 극이 허락한(...) 류의 분량을 뛰어넘는다. 여자 앙상블들이 모두 훌륭해서 볼 때마다 좋았다.


  
 
 




. 손짓.



나는 비둘기를 좋아한다. 
어디가서 말하기에 썩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실은 길에서 일부러 싫은 척을 종종 하기도 하는 그 도시의 걸어다니는 비둘기들을 좋아한다. 
떼로 날아가면 머리로 각종세균이 떨어진다더라, 그런 괴담같은 것을 품고 있는 점도 좋아하고 정확히 뭘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는 잡스러운 그애들의 식성과 항상 너저분한 것들이 묻은 진회색 회색 흰색 갈색 - 비둘기색! - 의 풍성하고 기묘하게 커다란 모습도 좋아한다. 덩치가 어떻든 얼굴은 새초롬하게 작고 부리가 못생긴 애들도 많고 발가락이 한둘 없기도 하고 아예 한발로 다니기도 하고. 날개가 상하거나 눈이 상한 애도 종종 목격되는 다양한 도시의 삶을 모습을 한 비둘기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제는 사람 발이 날개를 스칠 정도로 가까이 와도 아 거 조심 좀 하고 다니쇼. 하고 쳐다보는 도시의 식구들이다. 횡단보도를 같이 건너고 차와 자전거와 사람을 딱 그정도로만 피할줄아는 그애들은 도시에 산다. 산비둘기, 집비둘기 하고 부르는 멀끔하고 어여쁜 새들도 있지만 모두가 아는 비둘기는 도시의 보도블럭을 성큼성큼 걸어다니고 기껏해야 가로등이나 빌딩창틀에나 앉아 있는 완전히 도시살이에 익숙해있는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은 나보다 더 오래 도시의 길을 봤다. 자동차 매연과, 산업먼지와 미세먼지와 황사를 누비고 다녔고 폐수에 몸을 담그고 먹다버린 것들과 떨어진 것들과 누가 뿌려준 과자와 새벽의 토사물을 주워 먹으며 살았다. 솔직히 성분은 우리와 비슷한 것들을 먹으며 살았다. 그친구들은 정말로 가끔은 동물이나 새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거리에서 일하는 공무직원들이나 혹은 홈리스나 좌판 장사꾼들처럼 느껴진다. 바쁘게 혹은 천천히 지나가는 나를 하찮게 쳐다보고 딱히 오래 쳐다볼 위인은 아니네, 하고 이내 동그란 눈을 돌려버리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인다. 나는 그애들의 관심을 끌어 본 적이 별로 없지만 그애들은 내가 걸어다닐 때면 항상 나의 관심을 끈다. 와 저 비둘기는 아주 예쁘게 생겼네. 저 비둘기는 한발을 저네. 아니 쟤는 차가 오는데도 저렇게 느긋하네. 
  

출근하러 바삐 지하철역으로 걷다가 인도에 얌전히 엎드려 죽은 비둘기를 보고 몇초를 멈춰서 보았다. 예쁘게 눈을 감고 날개를 차렷하고 접은 채로 인도에 누워있었다. 추운날 아침 서울 뒷골목에서 객사라도 하듯. 잔잔하게 감은 눈을 보고 잠깐 화단쪽으로 옮겨 놔줄까 생각하다가 말고 다시 걸었다. 주변에 걸음을 재촉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의식했던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다들 가면서 그 모습을 보기를 약간 바랬다. 매일같이 서울을 걸으면서 보았던 뻔뻔스럽고 큼직한 비둘기들 중 하나의 죽음을 다들 보았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얘네들이 분명 어디서든 수명을 다하거나 사고로 병으로 죽고 있었을 텐데 나는 이런 뭐랄까 온전하고 고운 사체를 처음 봐서 신기했다고. 다들 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악 하고 고개를 돌렸던 로드킬 사체가 아니라 정말 얌전한 사체였다. 아직 밟히거나 파먹거나 썩지 않은 고대로의 비둘기였다. 죽은 비둘기. 평소보다도 훨씬 깨끗해 보였던 평온하게 감은 눈. 뭘 잘못 먹었었거나 지병이 있었거나 어디 부딪히고 한참 후 후유증에 떨어졌거나 그랬을까. 다양한 사인을 잠시잠깐 생각해 보았다. 비둘기가 죽을 만한 사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말고도 훨씬 많을 것이다. 어차피 비둘기의 사인을 밝히려고 애쓰거나 연고를 찾아줄 일도 아닌데 사체라도 좀 모두가 보아 주면 어떻겠는가. 곧 누군가는 수습해 줄 것이다. 양지바른 곳에 묻지는 못하더라도 내내 그 길에 놓여져 있을 수가 없는 위치였다. 지하철역에 들어갈때까지 돌아갈까, 돌아가볼까, 생각했지만 발은 계속해서 출근길을 걸었다. 너도 이해할 것이다. 도시를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으니까. 오래 지켜보았던 너는 예상했을 것이다. 나는 도시의 비둘기들이 그만한 통찰을 체득한 존재들이라 여긴다. 체념과 적응 그리고 그 안에서 나름의 치열한 삶. 그 도시의 삶을 살다간 비둘기를 보았었다. 다음날 같은 출근길에는 흔적도 없었다.
  


   

킬롤로지 초연 손가락질.

 

사회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뜨는, 원인과 결과 모두 이해되지 않는 끔찍한 사건들은 너무 흔하다. 밥 먹다가 아, 그 기사 봤어? 16살 남자애가.. 하면 아, 그거 제목만 보고 너무 끔찍해서~ 어떻게 된거래? 하고 이야기할 만한. 한 이틀 화제거리가 되고는 지나칠 이야기들의 어떤 뿌리,를 찾아보고 싶었던 희곡이었나 보다. 이런 일이 안 일어난다고? 아냐 비일비재해. 그럼 왜 일어난다고? 그 인간이 또라이라서? 모르겠어. 왜지? 그들도 우리인데? 어쩌다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에 대한 단순하고도 복잡한 물음.


 

저런 미소가 있다고? 말도 안 돼.

마땅히 알았어야 했을, 포근한 보호의 품이었다. 옷이랑 신발은 좀 아니지 싶었으니 그다지 유복한 가정환경도 아닐텐데, 생일이라고 딸의 취향에 꼭 맞춘 자전거를 선물하는 아빠. 아직 서툰 아이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단숨에 달려오는 아빠. 뾰로통하게 불량하던 얼굴에 치열하고 안타까운 질투 그 자체인 표정이 확 피어올랐다. 잔뜩 가시와 울분이 돋친 말을 내뱉을때보다도 가장 어린아이같은 순간이었다. 마주하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길거리에서, 혹은 뉴스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사악한 애새끼들이 실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그 애들이 미친 짓거리를 하게 될 때까지 무감하게 방치되어 있던 그 지난한 순간들에 대해서. 괜찮을거라고, 다 잘될거라고 믿을 수 있는 미소를 아무도 보여 주지 않았던 나날들에 대해서. 그 애들이 자신들도 다 깨닫지 못할 만큼 절망적인 질투를 느껴 약하고 선량한 존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짐작들에 대해서. 동정할 것이 무엇인지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가지는 명확할 수밖에 없다. 어떤 아이들도 저렇게 스스로 난처할만큼의 질투의 나락으로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알런의 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면 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데이비처럼 원망스럽고, 알란과 함께 죄책감에 빠진다. 도망치는 것은 그렇게나 쉬웠는데, 떨어지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데이비를 또 다시 만들어냈죠.

언제부터의 데이비가 상상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연기하는 이들에게는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야기를 듣는 나는 어차피 고통 속에서 재구성한 말들이라는 전제에서 현실과 망상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엔딩에서 눈을 감듯-혹은 뜨듯- 단번에 이미지가 사라질 때, 알란이 깨어났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허무감이 너무 크다. 깨어날 때마다 그는 점점 더 데이비를 잃는 기분에 가까이 갔을 것이다. 그 애를 온전히 품어본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상실감 역시 상상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극에서 데이비의 장면은 데이비와 알란이 그나마 인상적으로 만났던, 9살 무렵에서 시작한다. 마지막에 가서야 알란이 그 애의 학창시절부터(석준알란은 학교 다닐 때부터, 라고 말한다) 시작한다고 말할 때쯤 아, 우리가 처음 본 데이비가 몇 살이었더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가 본 모든 것은 알란의 상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데이비의 기억을 빌려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좋아한다. 알란처럼 드문드문 본 사이가 아니라 붙어살았다 하더라도 부모는 절대 알 수 없을, 아홉 살짜리 아이의 기억이다. 그게 그 사람을 본 마지막이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그 시간은 영원을 말한다. 다시는 보지 못했다고도, 혹은 상상을 빌려 만났다고도 말할 수 있는, 아주 오랫동안의 마지막. ‘아빠가 날 두고 떠났어요라는 어린아이의 단순한 고백을, 비로소 다 자란 데이비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다.

 

 

작품을 거듭해서 볼수록 메이시를 처음 본 날의 이야기가 너무나 슬퍼진다. 그것은 어쩌면 알란이 눈을 감을 때마다 간절하게 떠올리듯이 데이비가 떠올릴, 메이시와 아빠에 대한 기억이다. 열린 문 틈으로 보이던 엄마의, 그 깊이 새겨진 기억의 한켠에도 메이시가 있다. 그 때 그 애를 다시 봤어요. 그 애가 나를 안아 주던, 잡아 주던 유일한 존재라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직 메이시가 자기에게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가끔은 귀찮고 성가셨던 그 천진한 마음으로 함께했던 존재를 눈앞에서 잃는다는 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짐작도 하기 전에, 그 애를 잃었다. 그 막대한 감정은 도저히 설명으로 할 수 없어서 우리는 데이비가 들려 주는 순차적인 사건의 배열 같은 것만을 듣는다. 메이시는 울음을 멈췄어요. 그리고 대체 열세살짜리 데이비는 어떻게 혼자서 집까지 다시 돌아갔단 말인가. 차가운 메이시와, 폐허같은 공원에 남겨진 채로.

 

그래서 전 혼자가 되었죠, 또다시. 라는 대사는 정말로 알란이 쓴 것이다-말하는 순간의 데이비는 물론 진심으로 말한다-. 상상 속에서 자신이 또 떠나고 혼자가 된다니. 데이비는 사실 혼자가 아닌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매번 열여섯살의 눈으로 알란을 노려보는 데이비의 눈을 잊지 않는다. 날마다 열배는 나은 삶을 상상하는 알런이 결코 알 수 없었던-그리고 실은 짐작하기도 두려워했던-데이비의 외로운 삶을 관객들은 알고 있다. 그 말 때문에라도 상상 속에서 자신을 죽여버린 알란의 이야기는 상상이 된다. 한번도, 있어준 적이 없었다.

그 상상 속에서, 어느날부터 데이비가 아빠의 죽음에 울음을 터뜨렸다-두 배우 모두가 그렇게 되었다-. 더더욱 복잡한 심정이 된다. 그런 아이가 될 수도 있었다. 깨끗하고 편안하게 아빠를 보내주고, 혼자가 된 아들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알란이 제대로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시간의 결과, 따뜻한 위로와 미소조차 견디지 못하는 존재로 자라났다

, 진짜 참을 수가 없네.

 

 


폴이 아빠의 눈에서 보고 싶은 것은 투지, 분노, 불꽃이다. 그게 아빠를 나의 아빠이게 한 감정들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마 다정함, 신뢰, 기대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빠를 보내는 순간 폴에게 있어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아빠는 비어버린 껍데기처럼 느껴진다. 끊임없이 부딪쳐온 아버지라는 벽이 무너져 버리자 폴은 비틀거린다. 그렇게 아픈 방식으로라도 아빠에게 기댔었는데,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잡아본 어린 아이의 손을 놓았을 때 그는 마침내 서 있을 힘을 잃어버린다.

 

알란을 만나자, 폴은 늘 그랬듯이 알란이 원하는 정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 순간 알란을 설득하기 위해 쏟아내는 말들은 무척 진심같이 들리고 합당한 대답들이다. 폴의 기준에서 무척 협조적이고, 획기적인 답이라 할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리고 알란의 기준은 전혀 다른 데 있다. 아마도 그건 내가 데이비를 지켜줄 수 있는 아빠가 아니었다는 사실, 정도인 것 같다. 나는 데이비를 떠났고, 그래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을 이제야 하려는 거야. 그게 정확히 뭘까. 네가 말하는 것처럼 복수일까. 혼란 속에서 계속해서 울음이 흘러나오는 알란을, 폴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답을 찾아내지 못해 초조할 뿐 그는 험악한 연장을 들고서 어린애처럼 우는 남자를 그때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8살 폴리의 얼굴을 감싸던 아빠의 커다란 손, 에단이 돌아왔을 때 율폴은 똑같이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감싼다.

그 순간 아버지라는 것, 나의 아빠, 그 아이의 아버지, 눈앞의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기도 하지만 폴은 그 순간 다시금 아들이 된다. 넌 뭐든 할 수 있단다 나의 폴리, 하고 부르던 그 아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하고 신나게 놀기를 좋아했던, 하지만 아버지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던. 그래서 내가 너무 모자라기 때문에, 너무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너무 아버지와는 다르기 때문에 나는 항상 부족한 존재라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폴이 다시금 무한한 사랑과 걱정을 받는 존재였음을 생각해낸다. 아빠, 어디 있어요? 넘어지려는 폴을 잡아주는 아빠의 커다란 손은 없다.

 

그래서 제가 알았다고 했어요. 알겠더라고요.

다들 저 (사이코패스들로 가득한)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지 몰랐다. 그 위험한 거리에, 작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존재를 해칠 수도 있는, 훈련받은 적대감들이 그렇게나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렇게 네가 걸어서 도착한 집이 내 품안이 될 줄 몰랐다. 기적처럼 돌아온 집에서 아이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사랑하고 무슨 말을 하든 귀기울여주는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잃었던 희망을 되찾듯이 아이의 얼굴을 감싸자, 쏟아져 나를 덮치는 별들처럼 그렇게 몰랐던 감정이 닥쳤다. 엄습했다. 나를 가로지르는 별무리의 하늘을 나는 뒤로한 채 황급히 달아났다. 서 있기 어렵지만 그래도 나를 잡지 말아 줘.

 

 

그리고, 나만의 생일파티를 즐겼죠.

율폴은 정말로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 같다. (승대폴은 그것이 아빠의 엄격하고 반듯한 규율에서 가장 멀기 때문에 했던 것은 아닐까, 싶은 느낌이 있다) 때려부수는 게임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듯이 통쾌하고 재미있고 소소한 성취감도 느껴지며 그래서 중독성도 있다. 나아가 때리고 죽이는 게임은 아주 유아적인 형태의 무찌르기부터 총격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잔인성의 다양한 층위를 자랑한다. 응 뭐 그게 게임이지, 해왔던 것들이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현실의 인간을 파괴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알란(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온)의 주장처럼 그 훈련들이, 인간의 살인에 대한 혐오감을 극복시켜 줄 수 있는가? 아니 거기까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재미로 잔인한 컨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해도 되는가? 믿음과 독려를 받았음에도 자존감을 키우기 어려웠던 폴리는 게임을 하는 4시간 동안은 자유롭고 신이 났다. 바로 그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투쟁한 세월들 때문에, 우리는 자유에 관해서는 쉽사리 말을 보태지 못한다. 그래서 무엇이든 만들어낼 자유, 향유할 자유에 대해 고고한 턱을 들이대는 대신, ‘예술로 포장된 쓰레기라고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작가의 발언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지금의 우리가 좀처럼 도덕군자가 아님에도 그 발언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그 한 마디를 받아들일만 하도록 세 인물의 이야기로 차근차근 밑작업을 해놓았기에 가능했다. 보편타당한 결론을 내기는 어려운 문제이기에, 객석에 대화를 청하는 세 인물의 말을 들으며 매번 새로운 질문을 품는다.

 

폴이나 데이비는 끔찍한 이야기를 그저 게임이나 영화 스토리를 들려주듯이 흥미롭게 이야기하곤 한다. 폴이 시종일관 웃으면서(율폴은 천진하게, 승대폴은 오만하게) 아버지의 자수성가 스토리-에 얽힌 산업화의 그늘-나 골든샤워 미니게임을 설명할 때, 데이비가 열두살 아이의 오른발을 박살내는 랜달 패거리의 이야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의 교통사고 순간을 그리며 흥분해서 상세해지는 묘사들은, 결코 즐길만한이야기는 아니다. 그 순간 화자들은 가볍고 능청스럽게 신이 나서 이야기하고, 만들어내는 장면은 무척 극적이며 흥미진진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그러한 쾌감을 위해서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기에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물론 분명한 것은 그 안에 분명 쾌감이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재미있는 것을 즐길 권리에 대해서. 그런데 그것이 눈앞의 침입자를 스패너로 여러 차례내리칠 수 있는 실행력과 연관이 있다면, 그것도 정말 끝내주는행위인가에 대해서.

 


 

엄마가 너무 작아요.

캐롤의 삶은 옅게 내비쳐진다. 아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그저 내 인생을 끔찍하게 만들었다고만 느껴진 그 어린 여자의 삶. 교대근무를 끝내고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고, 아이를 집 밖으로 내보내던 사람. 그럼에도 강아지를 보면서 희망으로 빛나는 아들의 눈을 보고, 차마 강아지는 안된다고 할 수 없었던 여자. 그 엄마가 나한테 뭘 해줘야 할까봐, 도와달라고도 말할 수도 없었다는 데이비의 외침 뒤에 폴의 아버지는 제게 많은 것을 해주셨습니다가 붙을 때마다 스산한 마음을 쓸어내린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볼 수 있어요.

데이비의 대사는 약간의 힌트를 준다. 우리 그렇게 하잖아요 종종. 잊기 싫은 순간을, 또 잊히지 않는 순간을 눈만 감으면 언제든 볼 수 있잖아요. 폴리의 별이 쏟아지던 밤도 마찬가지로 가슴에 새겨져 있다. 눈을 감고 누운 알란이 바로 저기서부터, 옆방 아기침대에서부터 데이비를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비슷한 일이다.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되새겼을 기억과 거기에서 파생된 상상들에 대해서. 미련한 줄 알면서도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럼 저기, 저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알란이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누워 있는 그 느낌은 어느날부터인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절대 깨고 싶지 않아. 놓치고 싶지 않은 그 간절함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마와 코끝을 스치는 이불을 견디면서 숨결을 아끼는 그 촉감을 상상한다. 파르르 떨리는 이불천의 진동도 무서워서 애써 호흡을 고르는 그 간절한 숨. 많지 않은, 알란을 동정하는 순간들 중 하나다. 잃고 나서야 되찾으러 돌아가는 허망하고 비겁한 사람이지만 그 간절함은 진심이다. 무덤덤하고 좀처럼 나서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 같은 알란이 커뮤니티를 들쑤시고, 동지를 찾고, 공격을 감행하고, 모두에게 연설하는 변화들 역시 진심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누구나 겪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들이기에 어떻다고도 말할 수 없다.

단지 그렇게 기적처럼 살아왔더라면데이비가 눈을 뜨는 장면에서는 항상 그 생각만이 떠오른다. 데이비도 메이시가 기적처럼 살아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폴은 아버지가 기적처럼 일어나길 바랐을 것이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패달을 밟듯이.

 

 



+이집트 여행. ‘자리잡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공한 폴은 이제야 가족을 불러모아-우리가 들은 것은 24살 생일 이후 처음이다-가족여행을 갔다. 항상 그렇듯 누군가는 내키지 않아 하고, 그럼에도 다같이 가족의 이름으로 여행을 떠나고, 회복되는 것처럼 보인 일말의 화목함마저 잃어버려 손쓸 수 없는 상태로 돌아오는 흔한 사례다.

 

++엠나비때 뜻밖에 작품을 달리게 만들었던 J율배우는 확실히 기능적으로, 무척이나 뛰어나다. 뭐랄까 자신이 작게는 이 무대에서 크게는 작품 속에서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지를 영민하게 알고 퍼즐을 맞추듯 잘 풀어내는 느낌의 연기. 그런 의미에서 영화적인 연기다. 그냥 말하고 움직였을 뿐인데 보이는 배경을 바꿔버리는 현상을 지바고에서 승우배우를 본 이후로 처음 느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이 봤음에도 전작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프라이드 때에 비해서 정말로 영국 소년이 되었고. 말이 빠른 것은 항상 느끼는 부분이었지만 빠르지만 정확하게 치고 들어온다는 점에서 할말이 없었다(?). 장면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대본을 분석했을까, 싶게 빈틈이 없다. 촘촘히 잘 깔아놓은 포석을 딛고 마음껏 변주하는 것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마련이다. 나는 데이비를 110분만 볼 수 없으니 드라마 시리즈로 길게 길게 봤으면 좋겠다는 심경.. 왜 벌써 이 장면이지? 싶어 보면서도 아까웠다. 몸을 정갈하게 잘 쓰는데 언제 한번 맘껏 달리는 극에서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승대폴과 아버지의 갈등은 무척이나 표면에 드러나 있다. 항상 아버지라 호칭하며 손을 모으는 깍듯한 태도, 이집트 사건 때 처음으로 왈칵 아빠, 라고 부르며 따지는 모습은 정말로 한국적인 부자 관계와 닮아 있어서 익숙한 느낌을 준다. 대외적으로는 자신만만하고 저돌적인 남자로 보이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끌어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 에단에게 보이는 말투나 두 번째 사고를 쳤을 때 결국 손을 올리는 행동은 기대받는 아들임을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닿을 수 없는 기대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어린 폴리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에단에게 느끼는 감정은 좌절에 가깝다. 나는 결국 아버지처럼 되겠구나. 에단의 놀란 모습에서, 아직은 소심함을 갈무리하지 못했던 어린날의 자신을 보았을 것 같다. 내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는 결코 되지 못하고, 아이의 시간을 외로움으로 채우고 말 것이다. 승대폴은 도망친다기보다 고개를 돌려, 버린다. 뒤돌아보면 항상 따라오는 그림자들을 못본 채 하고 살아왔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이까짓 거 잊고 살 수 있는 거라고. 스스로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떨리는 뒷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괜찮을 거라는 미소를, 찬란했던 별빛을 다시 보고 싶어서 서둘러 고개를 드는 폴.

 

+++상대적으로 율폴의 아버지는 너무나 완벽하고 좋은사람이어서, 8살과 24살 사이에 어떤 결정적 지점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폴은 말투부터 걸음걸이, 성격과 취향 모든 것이 아버지와 굉장히 다른 사람이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존경하는 사람, 정도를 걷는 것이 편안한 사람이고 물론 폴리도 아빠를 좋아하는데, 도무지 아빠의 생각과 행동을 닮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빠는 게임 같은 걸 왜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폴리는 게임을 할 때만 진심으로 신이 나고 의욕과 아이디어가 생겨난다. 정답같은 아버지와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는데 좀처럼 너도 틀린 게 아니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다.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그만의 성취. 알란과의 평행선 토론중에 폴이 갑자기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때 느껴지는 폭발은 이집트에서의 사건이 어땠을지 짐작하게 해준다. 남들이 볼 땐 점잖고 훌륭한 아버지에게 여행지에서 갑작스럽게 악을 쓰는, 성공에 취해 건방을 떠는 아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또 나는 못나고 못된 아들. 오만하기보다는 쾌활해 보이는 율폴은 그만큼 정적 속에서의 우울이 무척 깊어 보인다. 과격한 게임소리마저 없는 정적 속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을 그는 제대로 견디지 못할 것이다. 눈물을 감출 생각도 별로 없지만, 누구의 위로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

 

+++오케이Okay, 라는 답이 몇번 등장하는데 특히 승대폴을 볼 때 아버지의 어투를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8살 때 아버지가 오케이? 하고 물었고 폴리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것이 텍스트로는 좋다, 받아들인다의 의미일텐데, 데이비가 랜달에게 오케이, 했던 것, 그리고 폴이 알란에게 오케이, 그만할게요. 했던 것은 모두 진짜 동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는 좋지도 괜찮지도 않아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떠올려 본다. 하나도 괜찮지 않고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대신, 자신을 향한 선량한 미소에 의자를 집어던진 열세 살의 데이비.

 


++++생각해보렴. 네가 만든 것들이 네가 죽은 뒤에도 수천년을 남아있다면 어떨지.

항상 그것은 폴의 게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당신이 떠난 후에 남는 것 중에는 아들’-자녀-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나도 있잖아요. 한번이라도 말할 수 있었다면 관계의 변동이 있었을지 모르는.

 

+++++폴은 다이아몬드를 뿌린 듯 반짝거리는 별무리를 아름답게 기억한다.

데이비는 아스팔트 위에 흩뿌려진 가짜 다이아몬드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폴과 데이비가 봐야 했던 것들의 간극. 나한텐 선택권이 없잖아요.

 


++++++딱 보니까 아빠 차를 끌고 나왔더라고. 나 같으면 줘도 안 탈 구린 차. 보면서는 주로 납작하게 생긴 구형 중형차를 상상했는데, 원대본에는 ‘mummy daddy people carrier’로 쓰여 있어 통상 패밀리 카라 부르는 형태인 것 같다. 뒷자석에 귀여운 카시트가 달린, 푸근하게 생긴 낡은 미니밴이 핑크색 큐빅이 박힌 어린이 자전거를 깔아뭉개는 장면.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한동안 객석만을 상대하는 놀라운 대화의 방식이다. 일부러 끊어 놓은 이야기들임에도, 아 잘 받았다, 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뭐랄까 마치 움직이는 계단들로 이루어진 층을 올라가는 게임에서, 딱 맞는 순간에 점프를 눌러 승승장구하는 기분인 것이다.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잘 올라가, 마침내 다르지만 또 같은 시선을 보내고 떠난다. 그게 이야기이건, 이미지건, 배우건, 음악이건 간에 무언가 무대에 머물러 있다가 떠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오랜만의 극이었다.

 

++++++++무대에서 처음 본 주승배우는 와 정말 화면이랑 똑같이 생겼다(?). 대본 읽고 데이비 누가 하지...하면서 길 가다가 마주치면 붙잡고 하자고 할 것 같은 이미지. 무대를 또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대에서의 전달력,을 갖춘다면 자기 캐릭터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그만의 골똘함을 더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딕션이나 성량의 문제가 아니라(문제이긴 하다. 대사를 몰랐다면 데이비가 병원에서 뭘 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전달하려는 의지의 문제랄까. 어느 장면에서나 혼자 꽁해 있는게 물론 이 작품에서는 무척 데이비스러웠다. 듣는 이를 똑바로 보지도 않고,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은 슬쩍 뭉개고 지나가 버린다. 대사를 입에 맞게 고쳐가는 의뭉스러운 구석도 무대배우로는 매력적이다. 막공때도 그랬지만 가끔 자기 감정을 잘 감당해내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미숙한 부분들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져 나름의 파괴력이 있었다. 아니 해리슨샘 말투 뭔데... 동네가 진짜 이상해 선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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